광활한 초원사막, 외로움을 다독이는 언덕의 소리

놔 줘라.

-내가 나에게-

외로움도 외롭다

너는 외로움이 네게 와서 머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네가 외로움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 거다.

이제 놓아주어라

잡았으면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너무 오래 잡혀 있으면 누구라도 괴롭다

그만 보내주어라

너 아닌 다른 이들도 만나고 싶은데
놓지 않는 너로 인해 외로움도 외롭다

돌아보지 마라

가둬 놓았던 외로움은 괴로움이지만
보내고 난 빈자리는 새로움이란다


– 현관에서 듣는 이야기 –

출국외인 出國外人

출가외인 언니들보다 더 멀리 밀려나는 출국외인出國外人,
나와 나의 글은 갈 곳이 없었다.
한글로 쓰고 한국인들이 읽는 내 글이 외국인의 글로 치부되어 한국의 시스템에서 홀대를 받았다.
그 가엾은 글을 위해 내가 지은 집이 이 블로그다.  

나는 미국에 있다. 내 집도 미국에 있고 내 컴퓨터도 미국에 있다. IP 주소도 물론 한국이 아니다.
그러한 연유로 한국의 시스템은 나를 밀어냈다.
[해외에서는 시청할 수 없습니다]라는 냉정한 문구를 영상 대신 보여주는가 하면, 회원가입 버튼조차 눌리지 않게 하는 곳들도 있었다.

親國과 媤國: 내 나라, 남편 나라

미국은, 마흔 살의 갓난 아기로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추운 곳이다.
낯설이를 극복하며 말을 배우고, 문화와 풍습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그러나 오래 묵어 화석이 된 내 기억들은 완강했다.
40년을 자리 잡은 모국어는 낯선 언어를 밀어내며 텃새를 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두 개의 언어들을 화해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가야 할 나라의 언어를 단념할 수도 없었다.   

유치원 그림책에서 시작해 대학까지 마쳤어도, 영어는 한국어 뒤로 숨기만 했다.
시민권을 받았어도,
친정나라 한국에도 시댁나라 미국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모호국 模糊國 시민권자로 살았다.
의붓며느리처럼 겉도는 외로운 시국媤國살이였다.

여행을 했다.
호기심 많은 내게 최상의 즐거움은 새로운 것들이었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못 가본 길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것들은 무한해도 할 수 있는것들은 유한했다.
학교를 졸업해야 하듯 여행도 멈추어야 했다.

계속하고 싶은 욕망과 추억과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해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학교에서 얻은 내면의 새로운 것들과, 여행에서 발견한 외부의 새로운 것들을 위해.

그런데, 어쭙잖은 옛 글쟁이 시절의 못된 습관이 아직 남아있었다.
마감이 임박해야 원고지가 메워지던 그 습관에 글은 자꾸 방황만 거듭했다.  

브런치에 글을 보냈다.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꽤 영향력 있다는 평을 듣는 플랫폼이라고 하여 많이 기뻤다. 희망도 싹을 틔웠다.

제법 글버릇이 바로 잡혀가는데, 이번에는 손목이 부러졌다.
지인의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으며, 손목 하나의 위대함을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그렇게 한 해를 또 소모하고, 다시 글쓰기에 몰입했다.
브런치 북을 만들고 발행일을 지키려 애를 썼다.
두 번째 책을 만들면서 작가 멤버십 신청도 했다.
당혹스럽게도 거절 당했다. 한국의 전화번호와 계정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보다 더 서운한 것은 내 질문에 대한 그들의 응답이었다.
[질문을 검토 중입니다.] 라는 쇠붙이 냄새나는 답장의 반복은 차라리 횡포였다.

해외동포 문학이란 곳은 아예 답장도 없었다.
심사 결과따위는 상관없지만, 무시와 홀대는 참 서운했다.  

단념하지 않고 또 다른 곳을 찾아보았다.
알라딘의 투비 컨티뉴드 라는 공고를 보면서 굉장히 설레었다.
[그만 두었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라는 공모주제, 그런 것들은 내게 얼마든지 많았다.
코로나 때문에 보류한 PCT 종주, 집 팔고 캠퍼 사서 시작하려던 노매드랜드 체험, 독감주사 후유증으로 중단한 대학원 공부’ 등등.

우선으로 해야 된다는 회원가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내 이멜 주소를 기입하는 순간 곧장 메시지가 떴다.
[외국인, 법인, 단체회원은 안된다]는 내용의 자물쇠였다.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꿀꺽 삼켰다.
“이제 알라딘에서 책 사는 건 끝이야!”
대신 그렇게 외쳤다.

가까운 상처일수록 깊고 아프다

한국인이기를 거부당한 나는 한동안 방향을 잃고 비틀거렸다.

우습게도 지인들은 내가 백인마을의 유일한 유색인으로 인종차별을 당할까 봐 걱정이다.
내 모국에게 가장 아픈 차별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 차별과 모멸은 내 집안에서 시작되었다.
1995년의 닫힌 시절이라 그랬을까? 외국인과의 결혼이 몹쓸 짓이라도 되듯 가족들은 쉬쉬 비밀에 부쳤다.
올케는 외국인 성씨를 우스꽝스럽게 발음하며, 근원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시집 가는 시누이를 무자비하게 경멸했다.
차라리 내가 외계의 다른 종족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수치를 주었다.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친인척들이었지만, 내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언니 오빠와 그들 가족 몇 명이 전부였다.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는 미국인 남자는 주말마다 한국인 아내에게 외출을 졸랐다.
가까운 관광지로 구경을 가자 거나, 백화점이나 시장에 쇼핑을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둘이 외출을 하면 꼭 누군가 입에 담지 말았으면 싶은 욕설을 내질렀다.
“야 이 양갈보 X야!”
내 귀를 찢는 그런 욕설들이 한국말 모르는 남편의 귀에 닿지 않는 걸 진심으로 감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 코쟁이는 와도 반갑지 않아!”
신촌의 어느 백화점 귀금속 코너의 남자는 내 면전에 대고 찍찍 반말로 쏘아붙였다.

내가 원하면 한국에 눌러 살겠다는 남편의 말에 나는 속으로 기겁을 했다.
“미국 가자.”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떠나 온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 사이에도 차별은 있었다.
“이번에 맞는 새 사위가 한국인이라지요. 아이구 다행이네, 참말로 다행이야.”
나를 겨냥한 게 아니었지만, 내 존재의 중앙을 관통하는 아픈 화살이었다.
“한국인 아니고 외국인 사위면, 참말로 불행인가요?”
내가 웃는 소리를 하면 그제야 내 존재를 의식하고 머쓱해 하는 사람들이었다.
동포들 속에 회색인으로 사는 것보다 백인들 속에 유일한 유색인이 차라리 편한 이유였다.

출국외인의 설음을 딛고

시스템의 차별은 더 심했다.
그것은 개인이 아닌 국적에 기반한 차별이었다.
한국 전화번호와 한국 계좌와 한국 신분증을 요구했고,
당선이 되어도 한국의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겠다는 곳도 있었다.
나는 그게 인종차별보다 훨씬 더 깊게 서러웠다.
나더러 한국인으로 되돌아오라는 뜻인가,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나를 그만큼이나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기도 했다.
내가 나에게 가하는 차별이었다.

닫힌 문 밖에 서서 울지 않기로 했다.
남은 식솔들만을 위한 친정집 문 앞을 떠나 온전한 내 집이 있는 나의 세상을 만들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 달이 넘게 걸려 만든 내 집, 내 블로그다.
피부색은 달라도 믿음이 같은 이웃들과
무작정 나를 사랑하는 꼬리형제가 함께 하는 집이다.  
예쁜 응접실과 세 개의 방도 있다.
44개 주 뒷길을 돌며 알뜰하게 담아온 흔치 않은 이야기들을 전시하고
영근 내 기억과 추억들도 크고 작은 접시에 담아놓았다.

출가외인이라고, 출국외인이라고, 밀려나기만 하던 내가 당당한 주인으로 서는 곳.
문을 두드리다 지친 날들 끝에서 문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된,
내 새로운 세상이 이 블로그다